D-14<!-- wp:image {"id":18972,"width":651,"height":645,"sizeSlug":"full","linkDestination":"none"} --> <figure class="wp-block-image size-full is-resized"><img src="https://koreagalleries.or.kr/wp-content/uploads/2026/06/스크린샷-2026-06-10-163819.png" alt="" class="wp-image-18972" width="651" height="645" /></figure> <!-- /wp:image --> <!-- wp:paragraph --> <p><strong>이상엽 개인전 《고요와 수행 Stillness and Practice》</strong></p> <!-- /wp:paragraph --> <!-- wp:paragraph --> <p>디지털 시대의 속도에 맞서, 가장 느린 회화적 행위로 언어와 감각의 흔적을 붙잡다</p> <!-- /wp:paragraph --> <!-- wp:paragraph --> <p>두루 아트스페이스는 이상엽 개인전 《고요와 수행 Stillness and Practice》를 개최한다. 이번 전시는 디지털 기술과 AI 이미지가 빠르게 생성되고 소비되는 동시대의 환경 속에서, 인간의 손과 몸을 통해 축적되는 회화적 행위의 의미를 되묻는다.</p> <!-- /wp:paragraph --> <!-- wp:paragraph --> <p>이상엽의 회화는 빠른 해석이나 즉각적인 정보 전달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 작가는 오히려 가장 느린 속도로 화면을 구축하며, 관람자가 세계를 인식하는 방식과 그 프레임을 가만히 들여다보도록 이끈다. 머릿속의 분석과 해석이 작동하기 전, 마음이 먼저 동요하고 감각하는 찰나의 순간을 회화로 붙잡는 것이다.</p> <!-- /wp:paragraph --> <!-- wp:paragraph --> <p>이번 전시는 에크리튀르(Écriture) 시리즈와 텍스팅(Texting) 시리즈를 중심으로 구성되며, 작가는 이 작업들을 유채색(Chromatic)과 무채색(Achromatic)이라는 두 가지 버전으로 병행해 선보인다. 여기서 색은 단순한 장식이나 감정을 설명하기 위한 도구가 아니다. 색은 화면과 관객 사이의 정서적 거리, 그리고 사유의 깊이를 조절하는 하나의 회화적 필터로 작동한다.</p> <!-- /wp:paragraph --> <!-- wp:paragraph --> <p>유채색 화면에서 색은 감정의 온도를 드러낸다. 각각의 단어는 서로 다른 색의 밀도와 긴장 속에서 진동하며, 정보의 소란스러움과 과잉된 감정으로 가득 찬 디지털 풍경을 반영한다. 관람객은 단어의 의미를 해독하기에 앞서, 색이 만들어내는 감각적 충돌을 먼저 경험하게 된다. 이는 디지털 환경이 요구하는 즉각적인 반응에 대한 작가의 회화적 대응이라 할 수 있다.</p> <!-- /wp:paragraph --> <!-- wp:paragraph --> <p>반면 무채색 화면에서는 감각의 소란이 걷히고, 형태의 무게와 획의 방향, 단어 사이의 침묵이 더욱 선명하게 드러난다. 이곳에서 단어들은 더 이상 요동치지 않는다. 대신 침잠하는 형태와 정제된 획의 궤적만이 남아, 의미 이전의 본질에 가까운 상태로 존재한다. 무채색은 관람객이 표면적인 감정을 넘어 더 깊은 사유의 층위로 내려가도록 이끄는 구조적 정적의 장이 된다.</p> <!-- /wp:paragraph --> <!-- wp:paragraph --> <p>에크리튀르 시리즈는 문자의 무게와 사유의 표면을 다룬다. 작가는 자신이 실제로 사용하는 노트북 화면의 물리적 크기인 33×24cm 캔버스 위에 납작 붓으로 화면을 채워나간다. 손의 멈춤과 가속, 마찰을 통해 만들어진 붓질은 기계적 알고리즘이 만들어내는 매끄러운 이미지와는 다른, 인간의 신체가 남긴 비가역적 흔적이 된다.</p> <!-- /wp:paragraph --> <!-- wp:paragraph --> <p>화면 중앙에는 고전적인 세리프(Serif) 서체의 단어들이 입체적으로 부착된다. 아크릴 판을 레이저로 커팅하고, 도색하고, 캔버스에 부착하는 모든 과정은 작가의 손을 거친다. 스크린 안에서 무게 없이 부유하던 글자는 실제 그림자를 만들고, 물리적 공간을 점유하는 조형적 대상으로 전환된다.</p> <!-- /wp:paragraph --> <!-- wp:paragraph --> <p>Love, Life, Money, Time, Power, Future와 같은 단어들은 단순히 의미를 설명하기 위해 제시되지 않는다. 각 단어의 형태와 비례, 밀도와 방향성은 그 단어가 세계 속에서 작동하는 방식을 조형적으로 드러낸다. 50여 점의 단어들이 전시장 안에 놓일 때, 관람객의 시선은 단어와 단어 사이를 이동하며 의미의 전이와 순환을 경험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단어의 의미는 고정된 설명이 아니라 관람객 각자의 사유 속에서 다시 완성된다.</p> <!-- /wp:paragraph --> <!-- wp:paragraph --> <p>텍스팅 시리즈는 전송되지 못한 말과 사라진 감정의 흔적에서 출발한다. 소통이 가장 쉬워진 시대라고 하지만, 우리는 수많은 메시지를 쓰고도 끝내 보내지 못한 채 지우거나 남겨두곤 한다. 작가는 그 머뭇거림의 순간, 말해지지 못한 언어의 자리를 회화의 표면으로 끌어올린다.</p> <!-- /wp:paragraph --> <!-- wp:paragraph --> <p>이 시리즈에서 작가는 거친 광목천 위에 물감을 묻힌 문자를 붙였다 떼어내는 과정을 반복하고, 물감에 실제 모래를 섞어 화면을 구축한다. 모래는 클릭 한 번으로 생성되고 삭제되는 디지털 이미지와 반대편에 놓인 물질이다. 그것은 손의 힘과 마찰을 요구하며, 한 번 굳으면 쉽게 되돌릴 수 없는 시간을 화면 위에 남긴다.</p> <!-- /wp:paragraph --> <!-- wp:paragraph --> <p>AI가 이미지를 만들고, 텍스트를 생성하고, 감정의 표현까지 모방하는 시대에 이상엽의 작업은 인간이 직접 밀고 당기며 남긴 물리적 흔적으로서의 회화를 제안한다. 모든 것이 빠르게 쓰이고 지워지는 휘발성의 시대에, 작가는 지워지지 않는 방식으로 “내가 이곳에 존재했다”는 사실을 화면 위에 새긴다.</p> <!-- /wp:paragraph --> <!-- wp:paragraph --> <p>《고요와 수행》은 언어가 출현하여 완성되는 순간과, 끝내 말해지지 못한 채 멈추는 순간을 함께 보여준다. 에크리튀르 시리즈가 사유가 형성되는 구조를 단단한 조형 언어로 축적한다면, 텍스팅 시리즈는 발화되지 못한 감정과 침묵의 자리를 거친 물성으로 붙잡는다. 여기에 유채색과 무채색이라는 두 가지 회화적 필터가 더해지며, 관람객은 감정의 온도와 사유의 침잠 사이를 오가게 된다.</p> <!-- /wp:paragraph --> <!-- wp:paragraph --> <p>두 연작이 하나의 공간에서 마주할 때, 관람객은 언어와 침묵, 생성과 지연, 디지털과 신체, 속도와 수행 사이의 긴장을 경험하게 된다. 유채색의 화면은 동시대의 과잉된 감각과 즉각적 반응을 환기하고, 무채색의 화면은 그 소란이 걷힌 뒤 남는 본질의 무게를 드러낸다. 이번 전시는 가상의 데이터를 소비하던 시선을 잠시 멈추게 하고, 각자의 내면에 남아 있던 말과 감각의 자리를 다시 마주하게 하는 정중한 자리가 될 것이다.</p> <!-- /wp:paragraph -->